봉화산은 서울 중랑구의 북쪽 지역에 자리를 잡고 있는 해발 고도 160m의 작은 산으로 묵동, 신내동, 상봉동, 중화동을 아우르고 있으며, 옹기테마공원은 묵동과 신내동 사이에 해당하는 봉화산 자락에 위치하고 있다. 전철로 보면 6호선 봉화산역에서 가까운 곳으로, 봉화산역에서 봉화산으로 오르는 초입이라 할 수 있다.
- 옹기테마공원에는 옹기가마를 복원해 놓았는데, 1,200도가 넘는 고온에서 구워야 하기 때문에 땔나무가 많이 필요해 나무를 구하기 쉬운 곳에 옹기가마가 자리했다고 한다. 서울에서는 1990년대 초까지 이 곳 봉화산이 연해 있는 신내동과 망우동이 가장 최후에 옹기점이 남아 있던 지역으로, 중화초등학교에서 봉화산 능선길 중심으로 번창하여 약 200명이 종사하였다고 한다.
- 사진을 보면 옹기를 빚는 장면을 볼 수 있는데, 신내동에 거주하던 서울시 무형문화제 제30호 옹기장 배요섭씨의 모습으로, 이 분의 자문에 의해 옹기가마를 재현하였다고 한다. 산림녹화 차원의 입산 금지령에 의해 땔감 구하기에 어려움을 겪고 환경문제 제기로 대부분의 옹기점들이 폐점하거나 경기도 지역으로 이주함으로써 중랑 지역에는 옹기가마를 복원한 배요섭씨의 후손과 다른 옹기장들이 없다고 한다. 서울 지역에서 가장 최근까지 옹기를 제작했던 역사의 현장에 귀중한 장인들이 없는 것은 아쉬운 현실이다.
- 옹기의 현재 모양은 삼국시대부터 만들어 사용해 온 한민족 고유의 형상으로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역사적 증거물이라 할 수 있다. 신석기시대부터 만들던 토기 등이 발전하여 현재 우리가 사용하는 ‘옹기’가 되었으니 옹기테마공원은 한민족의 귀중한 유산이라 할 수 있다.
옹기가마 바로 옆에는 ‘일급화약류저장소’라는 팻말이 남아 있다. 옹기가마를 복원한 이 곳이 총포 및 화약류 도매업체가 화약류 판매 저장소로 사용하던 일명 ‘봉화산 화약고’가 있던 곳임을 간접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봉화산 정상에는 봉수대가 있다. 봉화산은 글자 그대로 봉화가 있는 산이라는 뜻으로 전국에 걸쳐 9개의 산이 있으며, 여기서 말하는 봉화산은 서울 중랑구에 위치한 산을 말한다. 봉화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장거리 통신수단 중 하나로 주변에서 가장 높은 산에 봉수대를 설치하여 운용했다고 한다.
- 1993년 12월에 서울시 기념물로 지정된 봉화산 봉수대는 정식 명칭이 ‘아차산 봉수대터’이다. 아차산 봉수대가 종전에는 광장동 소재 아차산성에 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실제로는 서울시 중랑구 묵동 봉화산 정상에 위치하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서울 정도 600주년을 맞이하여 철저한 고증을 거쳐 중랑구 묵동 산 46-1번지, 신내동 산 139번지, 상봉동 산 6번지, 중화동 산 1번지 등 연면적 4,060평방미터에 대해 문화재로 보존되어 관리되고 있다.
- 옛날의 아차산 봉수는 함경도와 강원도 방면에서 남산 제1봉수로 연결되는 제1봉수로의 말단으로, 양주의 한이산에서 봉수를 받아 남산(목멱산) 제1봉수로 전달해 주던 곳이라고 한다. 현 봉수대는 다른 곳에서 현존하는 봉수대의 형태와 <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 등의 기록을 참고로 1994년 2월부터 복원작업에 착수하여 동년 11월 7일 복원하였다고 한다.
- 봉수란 봉(횃불)과 화(연기)로 국경의 긴급한 소식을 중앙이나 국경의 기지에 전하던 군사통신 방법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사용되었다. 한국에서는 삼국시대 이전부터 봉수제가 시행되었던 것으로 추측되나, 본격적인 국가제도로 확립된 것은 고려시대 부터라 한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봉수제를 이어받아 세종 때는 좀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인 봉수제가 확립되어 전국적인 봉수망이 정비되었으나, 1894년(고종 31년)에 이르러 폐지되었다고 한다.
봉화산은 비록 해발고도는 낮지만 주위에 높은 산들이 가로막지 않아서, 사방이 탁트인 지세로 남산의 봉수와 양주의 한이산 봉수를 일망무제로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있다. 지형을 활용하여 국방에 매진했던 선조들의 지혜가 옅보이는 귀중하면서도 자랑스런 중랑의 문화재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