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랑구청 뒤 봉수대 공원 초입에는 먹골배의 시조목인 청실배나무가 있다. 먹골배의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조선 세조때 퇴임 후 먹골에 터를 잡은 왕방연이 배나무를 심은 것에서 비롯된다. 우리나라에 배가 재배되었다는 기록은 삼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조선시대 허균의 <도균대작>에는 하늘배, 금색배, 붉은배, 큰배, 검은배 등의 여러 품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수 있다. 신고배는 1930년대 일본에서 들여온 품종으로 현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주요품종으로 자리잡고 있다. 조선초기 먹골에서 생산된 배는 청실배로 먹골에서 재배되었기에 먹골 배란 이름이 붙여졌다. 먹골 배는 물빠짐이 잘되는 사양토에서 재배하였기에 묵직하고 과즙이 풍부해 조선시대 왕실에 진상하기도 했다.
왕방연은 단종이 폐위되고 영월로 유배를 갈 당시 금부도사로 단종을 호송하던 임무를 맡았다. 유배지로 떠나는 어린 단종은 타는듯한 목마름에 목이 마르다 호소하지만 엄격한 조선의 법도는 이를 허락하지 않는다. 물 한 그릇이 뭐라고 그런 것마저 국법에 어긋난다니. 물 한 그릇 올리지 못한 왕방연은 그 자책감을 어찌 다잡았을까? 퇴임한 왕방연은 지금의 묵동이라 불리는 중랑천변의 먹골에 터전을 잡는다. 금부도사 왕방연은 <세조실록>에서는 거론조차 되지 않던 사람이다. 훗날 <숙종실록>에서는 단종을 호송한 것이 아니라 사약을 운반했다고 기록한다. 배의 수확시기인 10월에 단종은 17세의 나이로 승하했다.
왕방연은 먹골에 들어와 배나무를 심는다. 그가 배나무를 심은 까닭은 물한모금 바치지 못한 죄책감으로 인한 것인지 단종이 승하한 날을 잊지 않고 배를 올려 영월을 향해 절을 했다. 왕방연은 단종이 단물 가득 머금은 배를 사후에라도 실컷 맛보라는 충심의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배나무는 올봄에도 어김없이 수줍게 하얀 꽃을 피웠다. 꽃을 드러냈던 배나무는 단종이 승하한 10월 탐스럽게 열매를 맺었고 단종에게 배를 올려야 할 것 같은 시기가 되었다. 왕방연의 이야기 속에는 단종의 호송 임무를 마친 후 서울로 돌아오는 길 애달픈 마음 추스르고자 곡탄언덕에서 <단장가>를 지었다는 당대의 설이 있다.
“천만리 머나먼 길에 고운님 여의옵고
이 마음 둘 데 없어 냇가에 앉았으니
저 물도 내 안 같아야 울러 밤길 예놋다”
<단장가>
먹골에서 재배하고 수확한 청실배 한입 베어물고 옹기테마공원 안의 팔각정에서 바람따라 역사를 넘어 왕방연이 지었다는 단장가도 읊어가며 영월의 단종과 조우라도 해야겠다.
먹골 배는 배수가 잘되는 사양 토로 재배되었기에 배 맛이 좋다고 전해진다. 예전엔 지명이 구리시묵동에 속해 있어 먹골 배의 이름은 이름으로만 남게 되었다. 드넓게 재배되었던 배 밭은 빠른 개발로 인해 점점 면적이 줄어들어 해마다 배 밭이이 사라지고 있다. 봄 날 흰 눈같이 내리던 배꽃도 이젠 보기 어렵게 되었으니 아쉬움은 시대의 변화로 휑한 가슴에 채찍질을 당한다. 흐드러지게 피던 하얀 배꽃은 이제 시조 배나무 한 그루 중랑구청 뒤 공원의 한구석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봄 날의 흰 배꽃과 가을의 탐스러운 배는 사각의 기다랗고 높은 건물에 밤의 화려한 인공의 빛과 바뀌어 간다. 2017년 서울시 최초로 조성된 옹기테마공원의 배나무도 그렇게 밀려났다. 테마 공원 옆 옹기가마 체험장이 들어설 예정인데 그곳의 배 밭도 그렇게 자취를 감췄다. 지리적 공간은 배 밭과 옹기터 둘 다 가질 수 없는 아픔을 겪고 있다.